박철언 전 의원 회고록은 자신이 정권 최대 실세이던 시절 권력 비화를 담았다. 박 전 의원은 정치자금 수표 번호 등 관련자료를 치밀하게 모았다가 폭로했다. 그러나 YS 등 정적에 대한 비난이 많아 개인 원한을 푸는 기회로 이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다음은 내용 요약.
◆럭키 세븐
80년 7월 국보위서 5공헌법 작업 중 전두환 위원장이 나타나 대통령 임기 6년안에 대해 “대통령 임기가 7년은 돼야 한다. 숫자는 럭키 세븐이다. 6보다는 7이 낫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 자리에서 관철됐다.
81년 9월 우병규 정무수석이 요인들에게 전 대통령 추석선물을 전달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우 수석에게 “안정된 영도력 발휘로 나라가 안정됐다. 광주사태 등 정치범 석방해달라”고 했다. 김영삼씨는 대뜸 “너 어떻게 거기 갔느냐”고 했다. 우 수석이 선물을 건네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YS는 “전 대통령은 누가 하더라도 어려운 시기에 어려운 일 맡았다. 나는 현재 정치가 없다고 본다. 계엄하 국민투표는 자유선거도 아니다”라고 했다. 김종필씨는 ‘섭리와 운(運)’을 자주 언급했다. 정일권 전 총리는 “각하 사진에 사인해주면 걸어놓고 보겠다”고 했고, 이후락 전 정보부장은 “전 장군이 대통령 해야 한다고 내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김대중 납치 왜?
83년 10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전 대통령은 노신영 안기부장의 업무 추진 스타일을 높이 평가하면서 “역대 정보부장인 김종필, 김형욱, 김용순, 김재춘, 김계원, 이후락, 신직수 등은 모두 엉터리였다. 머리도 나쁘고 능력도 없었다”고 했다.
전 대통령은 다른 자리에선 “역대 부장들은 무식하고 돌대가리”라고도 했다. 전 대통령은 ‘김대중 납치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이라고 외신에 보도되자 윤필용, 손영길 등이 모여 이후락 후계론이 등장하게 됐다. 박 대통령이 이를 알고 치려고 하니 점수 회복을 위해 당시에는 큰 영향력이 없던 김대중을 납치해 오는 사건을 벌였다”는 것이다.
◆전 대통령 DJ 비난
전 대통령은 84년 2월 “김대중이를 미국으로 내보낸 것도 나 혼자 구상해서 한 것이다. 모두가 겁을 내어서… 미국에서 관심을 끌면 국내 요인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이고 아니면 실체가 드러날 것이니 내가 모험을 한 것이다”라고 했다. 전 대통령은 DJ의 미국 행적에 대해 “그러나 그는 국회의원이 될 자격도 없다. 그는 머리 나쁜 선동자에 불과하다”고 불쾌한 듯 말을 뱉었다.
◆허담 극비 방문
85년 9월 전 대통령은 서울을 비밀리에 방문한 북한 허담 특사와 한시해 수석대표를 경기도 별장에서 만났다. 전 대통령은 면담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만년필 모양의 호신용 무기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 1985년 9월 5일 전두환 전 대통령(오른쪽)이 경기도 기흥별장에서 북한 밀사인 허담 조선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와 한시해(가운데) 수석대표 일행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조선일보 DB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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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통령은 허담 특사에게 “여기에 오시면 누가 오시든 간에 신변에 대해서는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며 “몰라, 허 특사가 대남총책을 맡고 있으니까 부하를 보내 가지고 하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체 없어요”라며 아웅산 사건에 대해 간접적으로 지적했다. 전 대통령은 “83년도에 내가 버마에서 그 일을 당하고 왔을 때 군에서는 전쟁계획을 수립해서… 계획이야 다 되어 있었지만, 이거는 전쟁이다, 그래서 내가 군 지휘관들을 불러 가지고 전방을 전부 순시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는 친서에 ‘주석님께서는 광복 후 오늘날까지 40년에 걸쳐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모든 충정을 바쳐 이 땅의 평화 정착을 위해 애쓰신 데 대해, 이념과 체제를 떠나 한민족의 동지적 차원에서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는 문구를 넣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86년 2월 12~14일 두 번째로 평양을 방문했다. 전 대통령은 “미인계와 술을 주의하라”고 지시했다. 한시해는 나중에 “박대표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도록 뒷받침하겠다”며 내게 1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 1990년 1월 22일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노태우 민정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3당 합당을 전격 발표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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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 쿠데타 계획
민주화시위가 격렬하던 1986년 9월 26일 전 대통령은 직접 비상계엄 준비 지시를 내렸다. 10월 22일에는 비상조치 날짜로 “11월 4일 미국 중간 선거 결과를 보고 난 후에 11월 7일쯤이 좋겠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전 대통령은 10월 30일에는 “김영삼 김종필은 갑근세도 안 내고 있는데 탈세 혐의로 입건 가능한지 검토하라. 김영삼 김대중의 연행은 보안사에서 하고, 수사는 안기부에서 하라.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을 우선 막아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연말까지 더이상 조치는 없었다.
◆5공청산
5공청산 문제와 관련 88년 11월 전 전 대통령을 만났다. 전 전 대통령은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후임자가 선임자를 죽이는 것이 깨끗하다”고 했다. 납덩이보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전 전 대통령은 “이제는 나도 싹쓸어버리겠어. 나도 양심선언하겠어. 김대중이가 잡든, 김영삼이가 권력을 잡든…”이라고 했다. 3일 후 다시 전 전 대통령을 만났다. 전 전 대통령은 “대선 때 정치자금 25명으로부터 1010억원 걷었으나 실제 자금은 두 배 이상 들었다”고 했다.
"대권 주겠다" 통고받은 YS, 노태우대통령에 큰절
노무현 3당통합에 반대하자 "당 떠나도 무관"
◆3당 합당
야당과 통합을 위해 88년 9월 21일 상도동에서 YS를 독대했다. YS는 “김대중은 좌경화의 우려가 있다”고 했다. 보수대연합 운을 떼자 YS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신뢰의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같은 해 12월 다시 YS를 만난 자리에서 노무현 의원에 대해 “노사 분규에 개입하여 선동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YS는 “조금 순화시켰다. 크게 야단쳤다”고 말했다.
89년 1월 19일 DJ와 만났다. DJ는 “내가 김영삼 총재보다 건강하다. 그는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늙은 것 같다. 나보다 더 늙어 보인다. 내가 이제 65세지만 대통령을 한 텀은 할 수 있는 건강이다”라고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3월 야 3당 총재 회담 직후 “김영삼과는 장기 구도의 연계하에 처리하라. 김종필이 여야로부터의 로비로 재미를 보는 것은 시간 문제로 머지않아 끝날 것이다. 만약 YS가 차기 대권에 관심이 있으면 여당으로 들어와 기반을 닦고 대권을 쥘 길을 뚫어야 한다”고 했다.
89년 4월 3당통합과 관련 통일민주당 황병태 의원을 만났다. 황 의원은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과 관련해) 김대중 총재를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아마 돈과 김일성에게 보낼 친서를 전달한 것 같다”고 했다.
▲ 1990년 3월 29일 김영삼 당시 민자당 최고위원이 소련 방문을 마치고 귀국했다. 오른쪽은 함께 방소에 동행했던 박철언 당시 정무1장관. 조선일보 DB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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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나에게 “일(3당 합당)이 이루어지면 (구속된) 서석재도 석방시켜 주겠다”고 했다. 서석재가 석방되자 YS는 내 손을 잡고 고맙다고 했다.
3당통합 중개역을 한 롯데 신격호 회장과 저녁식사를 했다. 신 회장은 “앞으로 내각제 개헌을 통해 YS가 수상, JP는 대통령을 하고 그 다음에는 민정당에서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8월엔 평민당 박상천 의원을 만났다. 박 의원은 “(문 목사 사건 관련) 김대중 총재께서 크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호남권에서 들고 일어날 것이다. 10월부터 내년 춘투까지 데모가 계속되면 경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10월 노 대통령은 “JP는 꼭 집권하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체면만 세워주는 방향으로 하고 YS는 꼭 집권하겠다니 ‘시간을 끌면 너는 아무것도 안 된다. JP에게 다 주겠다. 그렇게 되면 YS 너는 제일 꼴찌가 될 것이다. 그러니 과감하게 부담지고 들어오면 우선권을 너에게 준다’고 승부수를 보내야 할 시점이다”라고 했다. 다시 YS를 만났다. YS는 당내 3당통합 반대 움직임에 “최형우 장석화는 못 쓰는 인간이다. 노무현은 당을 떠나도 무관하다”고 했다.
▲ 박철언 전 의원이 3당합당 전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40억원+α의 돈을 전달했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 공개한 당시 자필 메모. 메모 상단에 '자기앞수표', '20장' 등의 글자가 적혀있다. /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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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DJ에게도 기회를”
3당 합당 후 소련을 방문한 YS는 고르바초프가 퇴근하는 길에 부속실에서 선 채로 악수하고 2~3분간 몇마디 나눈 것이 전부다.
90년 8월 23일 DJ를 장남 김홍일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DJ는 “3당통합은 잘못된 것이다. YS의 정치생명은 실질적으로 끝났다”며 내각제 포기를 요구했다. DJ는 “수십년간 YS를 상대하면서 그 사람이 얼마나 엉터리이고 배신자인지 말하고 싶지조차 않다”고 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내각제를 실현해서 YS, DJ에게 단기간이라도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김복동 의원은 “노 대통령이 91년 4월 9일 주례회동에서 YS에게 대권을 주기로 정식 통고했더니 마룻바닥에서 큰절을 했다고 각하가 얘기하더라”고 전했다.
대선에서 YS가 당선된 뒤인 93년 1월 5일, DJ를 만났다. DJ는 “YS는 약하게 보이고 이용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면 무자비하게 짓밟고,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매달리는 사람”이라며 강하게 나가라고 충고했다.
◆자세한 요약본 -----------------------------------------------------------
박철언 전 의원이 11일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이란 책을 냈다. 자신이 정권 최대 실세이던 시절 권력 핵심부와 그 주변에서 일어난 비화들을 모은 내용이다. 박씨는 YS등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비난 내용을 많이 포함시켰다. 다음은 내용 요약.
◆ 럭키 세븐
80년7월 국보위서 5공헌법 작업중 전두환 위원장이 나타나 대통령 임기 6년안에 대해 “대통령 임기가 7년은 돼야 한다. 숫자는 럭키 세븐이다. 6보다는 7이 낫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 자리에서 관철됐다.
◆ 대법원장 면접
81년 3월~4월 전 대통령 지시로 대법원장 후보들 ‘면접시험’을 봤다. R후보는 “친분도 없는데 각하께서…영광이다. 안보가 민주나 인권보다 전제가 되는 것이다. 사법부 수장은 정치 공안사건은 정부에 협력해야한다”고 했다. K후보는 과거 전 대통령과 청와대 같이 근무했었다. 그는 “과거에 각하 잘 보좌 못한데 대해 반성한다. 유사시 법관들이 자연스럽게 정부에 협력토록 하겠다”고 했다. 전 대통령은 “K는 불가하다”고 했다. 다음에는 대통령 지시로 대법원판사들을 면접했다. 서울 하얏트 호텔에 방잡고 “차 한잔 할 수 있겠느냐”고 차례로 불렀다. 당시 이회창(李會昌)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이 가장 눈에 띄었다. 일선 정보기관과 법조 중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분위기 쇄신을 위해 젊고 소신있는 사람이 대법원 판사가 돼야 한다고 강력하게 건의했고, 이회창 판사가 대법원 판사에 임명됐다.
◆ 추석선물 반응
81년9월 우병규 정무수석이 요인들에게 전 대통령 추석선물을 전달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우 수석에게 “안정된 영도력 발휘로 나라가 안정됐다. 광주사태 등 정치범 석방해달라”고 했다. 김영삼씨는 대뜸 “너 어떻게 거기 갔느냐”고 했다. 우 수석이 선물을 건네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YS는 “전 대통령은 누가 하더라도 어려운 시기에 어려운 일 맡았다. 나는 현재 정치가 없다고 본다. 계엄하 국민투표는 자유선거도 아니다”고 했다. 김종필씨는 ‘섭리와 운(運)’을 자주 언급했다. 정일권 전 총리는 “각하 사진에 사인해주면 걸어놓고 보겠다”고 했고, 이후락 전 정보부장은 “전 장군이 대통령 해야한다고 내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 “정보부장 돌대가리”
11대 국회가 출범한지 얼마되지도 않은 81년 9월 청와대 허화평 보좌관이 “이번 정기국회 시원치않으면 내년에 국회해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 88올림픽 유치가 되면서 흐지부지됐다.
이철희·장영자사건때 전 대통령은 인척인 이규광씨가 문제되자 “이철희의 범행을 클로즈업할 필요가 있다. 여배우와 살았는데 변태성욕자다. 장영자와 정략결혼한 것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검찰수사에서 미진한 것은 보안사에서 하라”고 지시했다. 수사가 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 진행됐다.
82년10월 전 대통령은 노신영 안기부장 칭찬하며 “역대 정보부장은 무식하고 돌대가리들이다. 노 부장은 함세웅신부를 여섯 시간 동안 밥도 걸러가며 설득했다”고 했다.
◆ 역대 정보부장 평가
83년10월 수석비서관회의 전 대통령은 노신영 안기부장의 업무 추진 스타일을 높이 평가하면서 “역대 정보부장인 김종필, 김형욱, 김용순, 김재춘, 김계원, 이후락, 신직수 등은 모두 엉터리였다. 머리도 나쁘고 능력도 없었다”고 했다. 전 대통령은 다른 자리에선 “역대 부장들은 무식하고 돌대가리”라고도 했다.
전 대통령은 ‘김대중 납치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이라고 외신에 보도되자 윤필용, 손영길 등이 모여 이후락 후계론이 등장하게 됐다. 박 대통령이 이를 알고 치려고 하니 점수 회복을 위해 당시에는 큰 영향력이 없던 김대중을 납치해오는 사건을 벌였다”는 것이다.
◆ 전 대통령 DJ 비난
전 대통령은 84년2월 “김대중이를 미국으로 내보낸 것도 나 혼자 구상해서 한 것이다. 모두가 겁을 내어서…미국에서 관심을 끌면 국내 요인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이고 아니면 실체가 드러날 것이니 내가 모험을 한 것이다”고 했다. 전 대통령은 DJ의 미국 행적에 대해 “그러나 그는 국회의원이 될 자격도 없다. 그는 머리 나쁜 선동자에 불과하다”고 불쾌한듯 말을 뱉었다.
◆ 허담 극비 방문
85년9월 전 대통령은 서울을 비밀리에 방문한 북한 허담 특사와 한시해 수석 대표를 경기도 별장에서 만났다. 전 대통령은 면담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만년필 모양의 호신용 무기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전 대통령 허담 비서에게 “여기에 오시면 누가 오시든 간에 신변에 대해서는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며 “몰라, 허 특사가 대남총책을 맡고 있으니까 부하를 보내가지고 하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체없어요”라며 아웅산 사건에 대해 간접적으로 지적했다. 전 대통령은 “83년도에 내가 버마에서 그 일을 당하고 왔을 때 군에서는 전쟁계획을 수립해서…계획이야 다 되어 있었지만, 이거는 전쟁이다, 그래서 내가 군 지휘관들을 불러 가지고 전방을 전부 순시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에 보내는 친서에 ‘주석님께서는 광복후 오늘날 까지 40년에 걸쳐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모든 충정을 바쳐 이 땅의 평화 정착을 위해 애쓰신데 대해, 이념과 체제를 떠나 한민족의 동지적 차원에서 경의를 표해 마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86년 2월 12~14일 두번째로 평양을 방문했다. 전 대통령은 “미인계와 술을 주의하라”고 지시했다.
◆ 친위 쿠데타 계획
민주화시위가 격렬하던 1986년 9월26일 전 대통령은 9월26일 직접 비상계엄 준비 지시를 내렸다. 10월22일에는 비상조치 날짜로 “11월 4일 미국 중간 선거 결과를 보고 난 후에 11월 7일쯤이 좋겠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10월30일에는 “김영삼 김종필은 갑근세도 안 내고 있는데 탈세 혐의로 입건 가능한지 검토하라. 김영삼 김대중의 연행은 보안사에서 하고, 수사는 안기부에서 하라.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을 우선 막아라”고 지시했다. 11월2일에는 ‘11월8일 토요일 저녁 11시 비상국무회의 소집. 자정부터 비상계엄. 87년 1월 국민투표로 새 헌법 통과. 2월에 계엄해제’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그러나 11월 5일에는 권력 핵심 분위기가 상당히 바뀌었다. 전 대통령이 “12월 3,4,5 일중에 비상조치 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연말까지 더이상 조치는 없었다.
◆ 6·29 선언
87년 6월23일 노 후보를 만났는데 “전 대통령이 직선제를 하자고 하더라.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했다.(6·29 선언중 직선제 개헌 수용은 전 대통령이 먼저 제의했다는 내용)
◆ 5공청산
5공청산 문제와 관련 88년 11월 전 전 대통령을 만났다. 전 전 대통령은 “재산 헌납, 낙향 이야기가 민정당 고위층에서 나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후임자가 선임자를 죽이는 것이 깨끗하다”고 했다. 납덩이 보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전 전 대통령은 “이제는 나도 싹쓸어버리겠어. 나도 양심선언하겠어. 김대중이가 잡든, 김영삼이가 권력을 잡든…”이라고 했다.
3일후 다시 전 전 대통령을 만났다. 전 전 대통령은 “대선 때 정치자금 25명으로부터 1010억원 걷었으나 실제 자금은 두배 이상 들었다”고 했다.
◆ 3당합당1
3당 통합을 위해 88년 9월 21일 상도동에서 YS를 독대했다. YS는 “나는 김대중과 달리 보수의 길을 걷는다”고 했다. 보수대연합 운을 떼자 YS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신뢰의 감정을 느낀다”며 “김대중은 믿을 수 없고 좌경화의 우려가 있다”고 했다.
같은 해 12월 다시 YS를 만난 자리에서 노무현 의원에 대해 “노사 분규에 개입하여 선동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YS는 “김광일 변호사를 시켜 조금 순화시켰다. 크게 야단쳤다”고 말했다.
89년 1월 19일 DJ와 3시간 가량 만났다. DJ는 “내가 김영삼 총재보다 건강하다. 그는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늙은 것 같다. 나보다 더 늙어 보인다. 내가 이제 65세지만 대통령을 한 텀은 할 수 있는 건강이다”고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3월 야 3당 총재 회담 직후 “김영삼과는 장기 구도의 연계하에 처리하라. 김종필이 여야로부터의 로비로 재미를 보는 것은 시간 문제로 머지 않아 끝날 것이다. 만약 YS가 차기 대권에 관심이 있으면 여당으로 들어와 기반을 닦고 대권을 쥘 길을 뚫어야 한다”고 했다.
89년 3월 정주영 현대 회장이 찾아와 “박태준 의원이 박세직 안기부장과 함께 노 대통령 중간평가 투표에 대비해 롯데호텔에 방 하나 잡아 놓고 1500억원 모급한답니다”고 전했다.
◆ 3당 합당2
89년 4월 3당통합과 관련 통일민주당 황병태의원을 만났다. 황 의원은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과 관련해) 김대중 총재를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아마 돈과 김일성에게 보낼 친서를 전달한 것같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나에게 “일이 이루어지면 (구속된) 서석재도 석방시켜주겠다”고 했다. 서석재가 석방되자 YS는 내 손을 잡고 고맙다고 했다.
롯데호텔 일식당에서 3당통합 중개역을 한 롯데 신격호회장과 저녁식사를 했다. 신회장은 “앞으로 내각제 개헌을 통해 YS가 수상, JP는 대통령을 하고 그 다음에는 민정당에서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8월엔 평민당 박상천의원을 만났다. 박 의원은 “(문 목사 사건 관련) 김대중 총재께서 크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호남권에서 들고 일어날 겁니다. 10월부터 내년 춘투까지 데모가 계속되면 경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10월 노 대통령은 “JP는 꼭 집권하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같으니 체면만 세워주는 방향으로 하고 YS는 꼭 집권하겠다니 ‘시간을 끌면 너는 아무것도 안된다. JP에게 다 주겠다. 그렇게 되면 YS 너는 제일 꼴찌가 될 것이다. 그러니 과감하게 부담지고 들어오면 우선권을 너에게 준다’고 과감한 승부수를 보내야할 시점이다”’고 했다.
다시 YS를 만났다. YS는 당내 3당통합 반대 움직임에 “최형우 장석화는 못쓰는 인간이다. 노무현은 당을 떠나도 무관하다”고 했다.
10월 미국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노 대통령이 “귀로에 우리나라 신문을 보니 3김씨가 정권 퇴진 운운하며 악수하는 무의미한 사진이 톱이었고, 나의 외교활동은 한쪽으로 밀린 것을 보고 대통령할 생각이 없어지더라”고 했다. 그러자 강영훈 총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각하께서는 외국에서 밤잠 설치며…”라고 했고, 박준규 민정당 대표도 울먹였다.
89년1월26일 싱가포르에서 한시해 북측 대표와 회동 한시해 대표가 “박대표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도록 여러 측면에서 뒷받침해줄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상의해달라. 이번에 10만불 정도를 지원해줄 수 있는데 어떻습니까” 제의 ‘아니, 이양반 돌았나’ 생각.
◆ 미국 방문 때 CIA 등 ‘얼차려’
-89년4월 미 국무부가 나를 초청했다. 미국의 의도는 첫째 얼차려였다. 둘째는 힘의 과시였다. “미국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너희들이 무엇을 해도 우리의 정보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일종의 간접적 경고였고 교육이었다.
◆ 소련과의 수교협상
1988년 봄 부터 추진됐다. 88년 8월28일부터 2주일간 소련을 비밀 방문해 노태우 대통령 친서를 소련측에 전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과의 비밀 접촉 창구로 노보스티 통신 도쿄 지국장이 활용됐다. 1990년 3월 2차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수교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긍정적 답변을 받아왔다. 그 해 6월4일 노태우-고르비 정상회담이 LA에서 성사됐다. 그러나 한·소 수교에 대해선 아무런 합의가 없는 실패한 정상회담이었다. 그 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이용하는 등 숱한 비밀접촉을 거쳐 9월30일 전격적으로 유엔에서 외무장관들 간에 수교 서명을 하게된다.
◆ 중국과의 수교 협상
6공 당시 북방정책 담당 우리 팀은 소련보다 중국의 문을 먼저 열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은 소극적이고 소련은 적극적이어서 소련과의 수교가 먼저 이뤄졌던 것이다. 1991년 7월이 한중수교 과정의 클라이막스였다. 중국이 북한 눈치를 보느라 늦어지는 때였다. 핵심 지도부 5명에게 26쪽 짜리 편지를 보내서 막힌 대화를 풀려 했다. 그 뒤 92년 8월24일 수교가 이뤄졌다.
◆ 안재형-자오즈민 결혼 성사
1987년 사촌 처제인 현정화가 “재형이 오빠와 자오즈민 언니가 불쌍하다.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87년 8월 중국을 방문해 차오스 부총리에게 부탁했다. 그 뒤로도 중국 요인들에게 편지를 여러차례 썼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10월15일 중국 정부가 두사람의 결혼을 허가했다.
◆ 내각제 없던 일로
소련 방문을 앞둔 90년3월2일 김현철의 아파트에서 YS와 만났다. YS는 “내각제 합의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박 장관이 나를 화끈하게 도와주면 수월하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 것이고…민주계에 특별한 사람도 없고”라며 협조를 요청했다. 나는 “반드시 내각제를 해야 한다”고 맞서 YS와 충돌했다.
YS와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서 만난 것은 고르바초프가 퇴근하는 길에 부속실에서 선채로 악수하고 2~3분간 몇마디 나눈 것이 전부다.
90년8월23일 DJ를 장남 김홍일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DJ는 “3당통합은 잘못된 것이다. YS의 정치생명을 실질적으로 끝났다”며 내각제 포기를 요구했다. DJ는 “수십년간 YS를 상대하면서 그 사람이 얼마나 엉터리이고 배신자인지 말하고 싶지조차 않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내각제를 실현해서 YS, DJ에게 단기간이라도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내게 월계수회에서 손을 뗄 것을 지시했다.
김복동 의원은 “노 대통령은 91년4월8일 YS에게 대권을 주기로 최종 결정했고 4월9일 주례회동에서 YS에게 정식 통고했더니 마룻바닥에서 큰절을 했다고 각하가 얘기하더라”고 전했다.
대선에서 YS가 당선된 뒤인 93년1월5일, 김대중 총재를 만났다. DJ는 “YS는 약하게 보이고 이용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면 무자비하게 짓밟고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매달리는 사람”이라며 강하게 나가라고 충고했다.
전 대통령은 “노태우는 평생에 둘도 없는 친구인데, 옛날로 돌아가려면 노태우가 새 인간으로 돌아와야 한다. 6공 초기에 내 가족에 대한 박해는 모든 것이 노태우 한사람의 책임이다. 참모가 어떤 건의를 했다 하더라도…”
나는 “당시 제가 모든 일(5공마무리)를 한 것으로 돼 있으나 진실을 밝히자면 당시 취임 준비위가 공식적인 참모 기능을 하고 저는 당선자의 개별적인 자문에만 응했을 뿐”이라고 했다.
전 대통령은 “(도청과 동향 감시에 대해) 내가 노태우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를 제기하니 노태우는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연희동을) 찾아다니니 (나를) 보호하느라 도청하고 차단했다’고 그랬는 데 그럴 수 있는가?”라고 여전히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당시 노 대통령께서 주변 참모들의 동향 보고에 의거하여 그렇게 판단을 한 것이지 고의적인 핍박은 아니다”고 노통 한번 더 변호했다. 전 전 대통령은 “내 후계자로 노태우 이외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노태우에게 미리 여러차례 약속했었다. 괴롭힌 일도 없었다. 안가에서 있었던 장관들과의 격려 모임에 늘 늦어서 공개적으로 야단친 일이 있었을 뿐이다”고 말했다
◆ 출옥후 DJ 면담
출옥 후 DJ가 이강래 통해 만나자고 연락와, 영국 귀국후 일산 은거중인 DJ와 접촉했다.
DJ는 “YS가 통치 능력이 없어서 나라가 참으로 걱정. 언론사의 약점을 잡아쥐고는 교묘하게 조정하고 있다. YS는 복수심이 지극한 비인간적인 사람이니 앞으로 당분간 신경을 써서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YS는 평생을 봐 왔지만 약속을 하고는 돌아서서 배신하는 사람이니 나라를 맡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