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옛 한나라당 당사 앞을 지나다가 건물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남자를 봤다.
'한나라당이 당사를 옮겨간 것이 언젠데, 아직도 이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는 사람이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가 보았다. 예전에 '한나라당'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던 자리엔 '국가보훈처' 현판이 달려 있었다.
1인 시위를 하는 분 옆에는 사연을 담은 종이들이 게시되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입니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통령입니까'라고 쓰여진 종이, 최태동이라는 분의 전상 증명 서류, 서울행정법원의 '국가유공자비해당결정취소'판결문, 빨치산 출신 손윤규를 민주화운동유공자로 인정한 제2기 의문사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신문 기사 등......
사연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더위에 지쳐 땀을 흘리며 바닥에 앉아 있는 50대 후반의 1인 시위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옆에는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사연을 듣고 보니 기가 막혔다. 이 나라가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그 분의 성함은 최의한씨. 해병 183기 출신. 청룡부대원으로 월남으로 파병됐다가 다리에 부상을 당해 전역한 분이었다. 그 분은 6-25 당시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에 투입됐다가 1급 전상을 입고 제대한 부친 최태동 예비역 하사(작고)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달라고 투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분은 부친의 전상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그동안 육군본부에 자료공개를 요구하던 끝에 수년 전 관련 서류를 입수했다. 그는 이 서류를 근거로 국가보훈처에 부친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달라고 신청했다. 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 인정을 거부하자 그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행정법원에서는 '국가유공자비해당결정취소'판결을 내렸다. 최의한씨의 선친 최태동씨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라고 한 것이다. 다만 선친에 대한 보상을 소급해 지급해 달라는 원고측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훈처에서는 법원판결에 불복, 항고했다.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최의한씨는 그동안 청와대 앞에서 280여일간 1인 시위를 벌이다가 6월20일부터 국가보훈처 앞으로 옮겨와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최의한씨를 특히 열받게 한 사실은 작년 7월 빨치산 출신으로 1976년 수감 중 전향공작에 항거하다가 사망한 손윤규를 제2기 의문사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유공자'로 인정했다는 점이었다.
최의한씨의 항의는 절규에 가까웠다.
"내 아버지와 손윤규는 같은 지리산에서 총부리를 맞대고 싸웠소. 그런데 대한민국에 항거해서 싸웠던 손윤규는 민주화유공자로 인정이 되는데,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가 다리를 못 쓰게 되고 제대한 내 아버지는 국가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해요.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요?"
그는 노무현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그가 열린우리당이건, 한나라당이건, 개인적으로 진보건 보수건 간에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고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선서한 사람이요.
그런데 대통령직속 의문사위원회에서는 빨치산을 민주화유공자로 인정하고, 김일성을 항일독립투사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만길 같은 사람을 친일진상규명위원장으로 임명했어요. 이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통령이요?"
그는 국가보훈처의 행태도 비판했다.
"국가보훈처가 뭐하는 곳이요? 대한민국을 위해 피흘린 사람들을 받드는 곳이 국가보훈처 아니요? 설사 대한민국의 다른 관공서들이 붉게 물들어도 가장 나중에 붉게 물들어야 할 곳이 국가보훈처요. 그런 보훈처가 사회주의자들은 건국유공자로 인정하면서, 6-25 1급 전상자는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지 못한다고 해요. 속이 벌겋게 물들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는 게요?
보훈처장도, 심사 담당하는 보훈처 공무원들도, 자기를 임명해 준 대통령 뜻을 따라가야겠죠. 세상 흐름 따라가면서 일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그들도 기가 막히긴 할 거요. 설마 빨치산은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는데, 빨치산 토벌하던 국군 1급 전상자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리라고는 그들도 생각이나 해 봤겠어요?"
최의한씨는 "이 문제를 가지고 280일간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광을 왔다가 내가 1인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이 없어 하더라고요. 개중에는 자기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얘기해주겠다는 분도 있었어요. 봄에 청와대 관광 왔다가 가을에 다시 관광왔던 분들이 깜짝 놀래요. 자기 지역구 국회의원엑 얘기했는데, 아직도 1인 시위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죠.
열린우리당은 그렇다고 쳐요. 한나라당도 다를 게 없어요. 선거 때만 되면 보수를 찾지만, 한나라당 국회의원 가운데 나에게 관심 가져 준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는 "조만간 국회의원 전원에게 내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고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보겠다"고 했다.
최의한씨의 얘기를 듣는 동안 가슴이 턱턱 막혔다. 더위 때문 만은 아니었다. 하도 어이 없는 사연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음료수를 사다 드리고 자리를 뜨는 나에게 최의한씨는 말했다.
"같은 지리산에서 대한민국에 항거했던 빨치산은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받았는데, 대한민국을 위해 그를 토벌하러 나섰다가 1급 전상을 입고 제대한 국군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요.
내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이요, 아니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요?세상이 뒤집혀도 이렇게 뒤집힐 수가 있는 거요? 만약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런 나라를 위해 어떤 놈이 목숨을 바치려 하겠소?
나도 '조국의 부름'을 받고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제대했지만, 이런 나라를 위해 아버지와 내가 희생을 했다고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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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하근찬의 소설 <수난2대>에서 빌려왔다. 소설에서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 당시 징용을 갔다가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고. 그의 아들은 6-25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아버지는 6-25 때, 아들은 월남전에서 다리를 상하고, 이미 작고한 아버지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며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땡볕 아래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현실을 보며, "현실이 소설보다 더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 제목을 <수난 2대>로 했다.
최의한씨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1인 시위를 계속할 생각이라고 한다.혹시 옛 한나라당 당사 앞을 지날 일이 있는 분은 시원한 생수라도 한 병 사다 드리는 것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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